자랑스런 대우인
[Best] 대우에서의 기억
이형석 09.09.24 조회수 9575
2003년을 끝으로 26년간의 긴 대우생활을 끝낸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먼저 일선에서 그리고 후선에서 일과 삶에 최선을 다 하고 계시는 선후배 대우가족 여러분들께 인사드리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저와 대우와의 긴 인연 중에서 짧은 한 동안의 스토리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이형석입니다. (주)대우, 대우전자 등 그간 긴 세월동안 대우인 으로서 우여곡절과 어려웠던 일, 환희의 순간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우생활 중 절반이상을 대우의 세계경영의 첨병으로서 일하며 보람을 느꼈던 일들 중 한 토막을 회고해 봅니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세계경영의 경험과 노하우가 쏟아져 나오고, 이러한 귀중한 자산을 살려 다시 태어나 옛 명성을 되찾고 더욱 웅비하는 대우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986년 3월 런던 근무를 마치고 대우전자의 미주 수출책임자로 명을 받았습니다. 1983년 대한전선의 가전부문을 인수한 대우전자가 괄목할 만한 수출실적으로 명실상부한 가전 3사의 일원으로 시작한 지 3년이 경과한 시점이었습니다. 아직은 초라한 이름이었지만 대우라는 이름을 미국시장에 알리던 시기였고, 한국 기업의 엄청난 신장세에 놀란 미국의 막강 전통기업인 RCA , NAP 등이 한국기업을 상대로 제소한 Anti-dumping 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우는 가전 3사 중에서도 가장 높은 23.8% 라는 어마어마한 덤핑 마진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토록 엄청난 마진을 지불하고도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이제는 개발투자의 제약과 불리한 여건으로 TV를 비롯한 영상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미국기업의 전철을 받게 된 우리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국내 경쟁사들은 이제는 저토록 위세를 떨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할 수가 있었는데--- 다시 힘을 키워 더욱 훌륭한 역량으로 당당하게 경쟁대열에 설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믿습니다.
이 무렵은 또한 새로운 가전제품으로 VCR이 시장에 소개되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극장이 아닌 집에서 TV를 통해 볼 수 있는 이 획기적인 상품은 그야말로 누구나 있어야만 되는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VCR에는 소니의 베타시스템과 마츠시타(Panasonic)의 VHS시스템으로 나뉘어져 서로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이는 마케팅역사에서 두고두고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대우전자는 소니와의 밀접한 관계 및 베타시스템의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소니진영의 일환으로 베타 VCR을 생산하였으나 베타 진영의 완전한 패배로 궤도를 수정하여 VHS를 생산하게 되어 경쟁사에 비해 본격적인 출발은 다소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굴의 대우정신으로 무장된 우리의 엔지니어들의 불철주야 노력으로 후발주자로서의 핸디캡은 사라지고 다시 당당한 경쟁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베타가 최고라고 소리치다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슬그머니 VHS의 대열에 가담한 스타일 구기는 점은 있었지만---- 새로 시작한 VCR사업에서도 우리의 능력은 여지없이 발휘되어 원천기술 발명자이며 당시 미국시장 점유율이 30%에 육박하던 RCA에 년간 150만대의 우리제품을 판매할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에게 평탄한 길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거대시장인 유럽시장에도 다시 불공정 무역제재의 압력이 거세어졌습니다. 현지 생산기업인 Philips, Thomson을 비롯한 유럽기업들의 Anti-dumping 제소 압력이었습니다.
수입관세 14%에 추가로 덤핑관세를 지불해야 된다면 그것이 얼마든 간에 사실상 유럽에로의 수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가까스로 한국기업들은 판매가격 상한선을 두고 그 이하의 가격에는 팔지 않겠다는 소위 Price-undertaking을 받아들였으나 관세 14%를 부담해야하는 우리로서는 이미 그 가격은 경쟁력을 상실한 가격으로 유럽기업들의 물량 공백을 메워주는 수준의 수출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은 현지생산이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고 실제로 우리의 경쟁사 중에는 우리보다 반 발 앞서 현지에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대우전자는 미국시장 공략을 위한 멕시코 TV 공장을 건설 중이었고 각 사업부별로 해외진출의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었습니다.
대우전자의 영상사업본부도 윤용남 부사장님의 지휘아래 전주범 부장을 팀장으로 하는 TFT를 구성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럽 각국은 해외산업 유치와 높아지는 자국의 실업률 감소를 위해 각종 incentive를 주어가며 적극적인 해외기업 유치활동을 벌였습니다. 팀원들의 수개월에 걸친 현지답사와 조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우리가 낙점한 후보는 공교롭게도 같은 나라이면서도 다른 나라가 되어 버린 아일랜드와 영국의 북아일랜드였습니다. 지금도 그곳 담당자들의 친절하며 사려 깊으면서도 철저한 공복의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일랜드는 800년에 걸친 영국 식민통치에서 1948년 국토의 1/5정도인 북아일랜드 (Ulster지방)를 영국으로 남겨 놓은 채 독립을 하였고 그 이후의 북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은 테러와 IRA 그리고 Belfast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성실성과 프로근성으로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간의 많은 이야기들은 현지의 주재원들 간에 1년에도 몇 차례씩 만나며 지금도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각종의 안내서와 계약서들의 세부내용을 밤늦게까지 번역하여 요점을 정리 보고하여 허가를 받고, 일부는 현지 구석구석을 방문하여 협력 가능한 업체를 찾아다니는 등 지금에서 돌이키면 바빴지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던 순간순간들 이었습니다. 한국식당이 없는 출장지에서 날아갈 것 같은 쌀밥에 재스민차로 물 말아 먹던 생각도 납니다.
결국은 아일랜드가 아닌 북아일랜드가 낙점이 되었고, 그 대강의 이유는 시장규모 (북아일랜드는 영국이므로, 그 당시만 해도 EC가 완전히 통합되지 않아서 EURO 1 이라는 증명서 없인 같은 EC내에서도 수출에 제한이 있었습니다)와 인프라 (그 당시의 아일랜드는 지금의 위상과는 달리 EC내에서 비교적 빈국에 속했고 교통이나 관련 산업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및 영국정부의 파워에 의한 지원 등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북아일랜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00년 영국 통치기간의 후유증으로 독립된 아일랜드에 소속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주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신교도와 원주민인 아일랜드계의 구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인하여 영국정부에서도 이의 무마책의 일원으로 최대한의 지원책을 실시하여 영국 내에서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지역이었습니다. 혼자 차를 몰고 다니기 미안할 만큼 잘 닦이고 사통팔달하는 도로, 각종 공공 편의 시설, 그리고 엄청난 교육 투자를 통해 이루어낸 수준 높은 대학교육과 양질의 인력 등이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단 두 가지 색깔로 표현됩니다. 위 하늘은 회색, 아래 땅은 초록뿐입니다. 땅을 파야 흙을 볼 수 있고 큰 건물에나 들어서야 시멘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온 땅이 푸른 잔디입니다. 어디에나 구멍만 뚫으면 골프장이 될 것도 같은 아일랜드는 서정적인 민요 "아, 목동아!" 가 탄생된 고장이기도 합니다.
그 밖에 대강의 조건은 부지는 무시할 만한 수준의 저렴한 임대료에 의한 95년간 임대 (영국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여 매매가 금지입니다. 임대계약 시작이 1989년, 대우가 건재했더라면 아직도 75년이나 남았었는데) 건축비 약 300만 불의 60%지원 및 융자, 설비 lease 자금의 지원, 현지인 채용지원금 및 각종의 현금지원금 등으로 이루어져 대우로서는 투자금의 대부분을 현금출자 없이 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의 대가로 대우가 져야 되는 의무는 3-5년간 일정수준(2-300명)의 현지인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이외 무형의 지원으로는 북아일랜드 및 영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공장 건설시의 의무조항의 면제나 대관업무에서의 최우선 협조, 주재원들의 정착지원, 자녀들의 교육알선, 대EC와의 통상문제의 적극적 협조 및 해결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심성의껏 대우의 안착과 발전을 위해 애써준 것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감사하고 고맙게 여겨집니다. 북아일랜드 정부기관을 대표하고 대우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후 오래지 않아 병마로 세상을 떠난 우리의 친구였던 고 Mr.McNeill 또한 우리의 감회를 젖게 합니다. 지금 다시 한 번 그의 명복과 가족의 행운을 기원하고 싶습니다.
1988년 11월 대우는 김용원 사장님과, 영국정부의 북아일랜드 장관인 MR.Tomking의 참석 하에 기공식 (Ground breaking ceremony)을 거행했고 이후 일사천리로 공장건설, 설비장착, 시운전 등을 거쳐 기공식 5개월만인 1989년 5월에 정식으로 공장을 가동하였습니다. 기공식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대우마크가 선명한 Forklift를 준비하여 김용원사장님께서 직접 첫 삽을 뜨는 이벤트도 연출하였습니다. 대우전자의 세 번째 해외공장 가동이었던 VCR 공장 (Daewoo Electronics U.K. Limited)은 첫해 10만대 생산 (매출 $2,200만)을 시작으로 그 이후 VCR이 DVD로 대체되기 까지 매년 20%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어 평균 30만대 (매출 $6천만)이상을 생산하며 매년 15%의 순익을 달성하는 명실상부 대우전자 해외 Operation의 성공적인 본보기로서 국내외에 널리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본사 경영진 및 책임자들의 정확한 판단력, 추진력 및 적극적인 후원과 더불어 현지공장을 지원하는 본사와 공장의 일사불란한 협조아래 전 대우전자의 성원들이 이루어낸 값진 성과였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장운영에서 일천한 해외 Operation 경험을 감안하여 우리를 보완할 수 있는 현지 인재발굴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현지 인력관리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해외공장에서는 처음으로 현지인을 인사 및 총무담당 임원으로 채용하여 현지 인력의 관리를 현지인의 통제 하에 두도록 하여 초기부터 문화차이에서 오는 서로간의 오해나 노사문제를 방지하여 안정된 operation을 통한 경영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현지공장의 빠르고 안정된 정착을 위하여 노력한 엔지니어들의 노력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전제품의 생산경험이 없던 지역인 관계로 유망한 현지 인력을 발굴하여 교육하고 한편 부품의 현지화를 위해 현지기업체를 수없이 드나들며 설득하고 재촉하였던 그들의 노력이 떠오릅니다.
현 시점에서 VCR 공장의 북아일랜드 진출과 성공의 의미는, 대우의 해외지향적인 적극적인
의지의 실현과 지금은 타의에 의해 꺾여버린 세계경영의 조그마한 징검다리로서의 소임을 이루어냈으며, 당시 거의 예외 없이 적자 행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한국기업도 해외에서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본보기가 된 점일 것입니다.
2년 전에 마지막으로 공장 문을 닫고 북아일랜드에서 완전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르고 회한이 맺히기도 했습니다만 대우가 다시 일어서서 세계경영의 불씨를 이어가는 후배들의 자랑스러운 경험담, 무용담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이만 줄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