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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섭회원 기고2]민간기업이 주도하는 체제전환국들 간의 비주류 경제블럭 구상(2)
세경1팀 09.09.23 조회수 6490
당시 체제 전환국들의 고민
이제 1990년대 초반, 즉 이 나라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분리되어 세계 주류 경제 질서 속으로의 편입을 강요받았고, 대우의 ‘세계경영’이 시작되었던 그 무렵에 이 나라들이 안고 있었던 고민들을, 당시 이 나라들이 보유하고 있던 국영 자동차 공장들의 실태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과거 자신들의 경제활동의 주된 무대가 되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자본주의 국제경제 질서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완전히 달라진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새롭게 개척해 나가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던 이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국영 자동차 공장들 역시 조속히 자본을 유치해서 생산 설비를 현대화하고 경쟁력을 갖춘 신제품을 개발하며, 새로운 시장 개척을 통해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과 직접 경쟁하여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 국가들 간의 경제 협력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과 경쟁할 만한 제품을 개발할 기술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생산설비를 갖추고 신제품을 개발할 자금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결국 서방의 자본을 유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당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폴란드 정부는 서방 자본의 유치를 위하여 자신의 자동차 공장을 매물로 내어 놓습니다. 이에 미국 자동차 회사 GM이 관심을 보였고, 1991년경부터 폴란드 정부와 GM과의 협상이 시작됩니다.
약 5년여 동안 진행되었던 이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맙니다. 협상 결렬의 가장 큰 이유는 GM이 인수 조건으로 폴란드 공장 종업원의 대규모 해고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GM이 폴란드 공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폴란드 정부의 시각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폴란드 정부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EU는 EU 회원국이 아닌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들을 구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EU 역내로 수출할 경우 (즉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을 원산지로 하는 제품), 그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EU는 이 혜택을 부여하면서, 제품의 원산지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 제품을 구성하는 부품의 60%가 해당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가 자동차 조립에 필요한 부품을 외국에서 전량 수입해서 조립, 판매한다면 (예를 들어 100% CKD) A는 이 혜택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A가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부품 비율을 40% 이하로 낮추고 60% 이상의 부품을 자신의 나라에서 현지화해서 생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폴란드 정부는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하여 부품 국산화 비율 60%를 최대한 빨리 달성해 줄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을 것이며, 루마니아 정부 또한 이와 비슷한 처지였을 것입니다.
폴란드나 루마니아의 경우 EU 회원국이 된 이후의 상황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자동차 공장이 EU 가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자신들의 내수 시장에 관세를 감면받고 쏟아져 들어올 유럽의 자동차 업체들과 직접 경쟁할 수 있는 제품 디자인 능력, 생산 기술 등을 확보하는 것이 사활적인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GM은 이러한 폴란드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품 국산화를 신속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투자와 파격적인 기술 이전이 필요한데 이는 GM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GM은 유럽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 투자보다는 폴란드의 저렴한 인건비 등을 활용하여 값싸게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해서 폴란드 내수 시장에 주력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미 경쟁력을 갖춘 메이저 업체들이 후발 자동차 산업국에 대해서 흔히 구사하는 ‘각개격파’ 전략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즉, 신규 시장에 들어가서 현지 자동차 공장을 인수, 그 공장이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제품 개발능력은 거세해 버리고 투자를 동결하여 공장 운영비용을 대폭 줄인 후, 자신들이 설계한 모델을 저렴한 비용으로 단순 조립하는 공장으로 전환하고, 자체 내수시장을 장악하여 당분간 그러한 방식으로 운영하다가 그 공장이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손 털고 나오는 그런 전략이지요.
이러한 GM의 의도는 그들의 협상 과정에도 잘 드러납니다. GM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폴란드 공장의 가치는 더욱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 1991년에 시작된 GM과의 협상은 대우가 인수 의사를 표명한 1995년에 이르기까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 폴란드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GM이 유럽 수출을 간절히 희망하는 폴란드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GM은 그 당시 유럽에 Opel이라는 자회사를 두고 많은 제품들을 유럽에 출시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Opel과의 관계를 고려하다보면, GM 입장에서는 Opel과의 관계 때문에 폴란드 공장에 투입할 모델 선정에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되고, 판로 확보에도 많은 장애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GM은 폴란드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997년에 있었던, 우크라이나 공장 인수를 위한 현지 정부와의 협상에서도 GM은 종업원 대량 감축을 요구하였고, 전체 공장 설비를 인수하지 않고 일부 GM 모델을 단순 조립할 수 있는 조립 공장만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자체 내수 시장과 러시아 시장 공략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내 자동차 산업이 몰락함으로 인해 관련 부품업체들이 대거 도산하고 마땅한 제조업 기반이 없던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고, 이러한 이유로 폴란드 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공장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파격적으로 기술을 이전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나 GM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GM같은 자동차 회사들, 즉, 전 세계적인 생산망과 판매망을 이미 다 갖춘 메이저 회사들이 이 나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신규 판매 루트를 확보하는 것보다는, 소량의 자동차를 값싸게 생산해서 현지 내수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들은 아쉬울 것 없고 노회한 세계 메이저 업체가 아니라, 리스크를 서로 나누어 부담하고 수익 또한 나누어 가지며 그들 나라의 국가경제와 함께 성장해갈 수 있는, 그 나라들이 해당 프로젝트에 사활을 거는 만큼 그들 또한 그에 준하는 중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진지하게 프로젝트에 임할 수 있는 그런 전략적인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