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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섭회원 기고4]민간기업이 주도하는 체제전환국들 간의 비주류 경제블럭 구상(4)

세경1팀 09.09.23 조회수  6521

대우가 주도한 국가 간 경제협력 모델

 

역내 무역 장벽 해소를 통한 단일 시장의 창출의 필요성

 

다시 논의를 당시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의 자동차 사업에 집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우와 같은, 이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그러한 전략적 파트너가 이들 국영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다면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들이 가장 먼저 직면할 문제는 아마도 협소한 내수시장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폴란드 시장을 중심으로 동유럽 자동차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규모 설비 투자를 감당할 만큼 자체 내수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생산시설과 부품 공급 능력을 갖추더라도 내수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할 경우 공장 가동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원가 부담으로 이어져 공장 운영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당시 동유럽 자동차 사업의 핵심은,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고, 이들 나라들이 EU 등의 대규모 단일 시장에 편입되기 전까지 어떻게 리스크 관리를 해 나가며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협소한 내수시장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단일한 시장을 창출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역장벽을 없애고 자동차와 관련 부품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를 이런 방식으로 묶을 경우 인구 약 1억 1천만명의 단일한 시장이 형성됩니다. (폴란드 4천만 / 우크라이나 4천만 / 루마니아 2천만). 이러한 시장 창출을 위하여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은 이 지역을 ‘자유무역지대’ 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실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루마니아가 자유무역 지대를 창설할 경우, 폴란드는 여타의 나라와는 다르게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면제해 주어야 하는데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WTO 협정의 ‘최혜국 대우’ (Most-Favoured-Nation Treatment) 조항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WTO가 이러한 조항을 이유로 회원국 간의 자유 무역 지대 창설을 금지할 경우 이는 자유 무역 권장이라는 WTO 설립 취지에 어긋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WTO 협정은 '최혜국 대우‘ 조항에 대한 예외 조항으로 ’자유 무역 지대 창설‘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즉, 여러 WTO 회원국들이 모여 자유 무역 지대를 창설할 경우, 그 회원국들이 자신들의 자유 무역 지대 파트너 회원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면제해 주고, 자유 무역지대 파트너가 아닌 다른 회원국에서 수입되는 동일한 상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WTO 협정의 ‘최혜국 대우’ 조항 위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U가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조항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본 예외 조항의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자유 무역 파트너 사이에 관세를 면제해주는 범위를 한 두 개 품목으로 제한해서는 안되고,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서 서로 관세를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만약 A B, C라는 나라가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상대방으로부터 수입하는 자동차에 대해서만 관세를 면제해 주고, 가전제품 등 다른 상품들에 대해서는 현행 관세율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본 예외 조항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WTO 회원국들이 본 예외 조항의 적용을 받아가며 자유 무역 지대를 창설하고자 한다면 자유 무역의 대상을 전 품목으로 확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EU가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루마니아의 사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나라가 참여하는 자유무역 지대를 창설하고자 할 경우,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WTO의 회원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들 사이의 자유 무역 지대 창설은 WTO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며, 자유 무역 지대 창설을 추진할 경우 WTO 회원국인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심각한 통상 압력에 시달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우크라이나가 조속한 시일 내에 WTO에 가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크라이나가 WTO에 가입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점은 남습니다. WTO 회원국들 사이에 창설된 자유 무역지대가 WTO 체제의 보호를 받으려면 거의 모든 품목이 자유 무역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 무역 지대 창설은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유사한 국가 전략을 가지고 있지만 처한 상황이 확연히 다른 폴란드와 루마니아, 그리고 상이한 국가 전략을 가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상반된 이해관계들을 당사국들이 과연 조정해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 나라들은 외형상 체제 전환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경제적 통합이 보다 용이할 것 같지만, 그 속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EU 소속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이질성보다 더 많은 이질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WTO에 가입하고, 이 나라들이 성공적으로 자유 무역 지대 창설에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점은 남습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모두 자신의 국영 자동차 공장을 가지고 있고, 자유 무역 지대 창설로 단일화된 역내 자동차 시장을 자신들이 석권하기 위해 각기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 투자를 하다보면, 비슷한 차종, 유사한 부품 생산에 중복 투자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각 나라의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자유 무역 지대 창설 등의 경제협력 모델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국 각국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시장의 논리‘에 맡겨둘 수밖에 없고,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철저히 단련되지 못한 이 나라들의 경제 기반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간기업이 주도한 단일한 시장과 생산 시스템을 구축

 

앞에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의 자동차 시장을 국가 주도의 무역 자유화 체제라는 틀로 묶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 나라들은 국제 경제 질서에 대응하는 국가적 전략이 각각 달랐고, 경제 규모나 발전 수준 또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들의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해 절실하게 요구된 단일화된 자동차 시장 창출을 민간부문이 주도할 수는 없을까? 이 점 관련하여 우리는 대우가 진행한 몇 가지 사업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우는 1996년에 당시 1,500cc급 주력 차종이었던 씨에로를 한국 공장에서 단종하고 이 설비를 루마니아로 이전하여 루마니아 공장에서 씨에로를 100% CKD로 생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대우자동차 한국 공장은 1,500cc급 신모델 라노스를 곧 출시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에로 생산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씨에로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는 낡은 모델이었지만 루마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시에로 생산기지를 루마니아로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루마니아 자체 내수시장만 보았을 때에는 씨에로 생산이 채산성을 갖추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루마니아 공장에서 생산된 씨에로를 루마니아 밖으로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996년 루마니아 공장이 씨에로 생산을 개시할 무렵, EU가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부여한 혜택, 즉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EU 역내로 수출할 경우 그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는 혜택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면세로 수출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루마니아 공장은 100% CKD 생산방식으로 씨에로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EU가 이러한 면세 혜택의 조건으로 내세운, 부품 국산화 비율 60%를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CKD 생산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보통 CKD 생산 초기에는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모든 부품일체, 즉 차체나 엔진 같은 주요 부품에서부터 룸 미러 같은 비교적 소소한 부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품을 한국에서 실어 와서 이를 현지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게 됩니다. (100% CKD). 이와 병행하여 현지 부품업체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작업을 아울러 진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품 업체들의 품질수준을 점검하여 일정 수준에 이르면 그 부품은 한국에서 더 이상 가져오지 않고 현지 해당 업체로 하여금 공급하도록 하여 부품 수입 비율을 초기 100%에서 지속적으로 줄여 나갑니다. 이것이 소위 ‘부품 국산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마침내 모든 현지 부품 업체들이 품질 수준을 맞추게 되고 안정적인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면 한국에서 가져오는 부품들이 현지 부품으로 모두 대체되고, 명실상부하게 현지에서 생산된 대우 모델의 자동차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 루마니아 공장으로서는 부품 국산화 비율 60%에 도달하기 이전까지는 이 혜택을 이용하여 EU에 면세로 씨에로를 수출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수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주변 동유럽 시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마니아 - 대우 - 폴란드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대우의 동유럽 자동차 사업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대우는 폴란드 정부로부터 자동차를 SKD 형태로 면세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받았습니다. SKD란 ‘Semi-Knock Down’의 약자인데, 이는 CKD처럼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부품들을 완전히 분리한 상태가 아니라, 완성차에서 시트, 후드, 핸들, 도어 등 일부 부품만 떼어낸 상태를 지칭하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폴란드에 씨에로를 구입하고자 하는 고객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루마니아로부터 씨에로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씨에로 CKD 생산 → 대우가 중간 수출상 자격으로 생산된 씨에로를 구매 →SKD 분리작업 수행 → 대우 명의로 폴란드 내로 수입 → 관세 면제 → 폴란드 현지에서 SKD 조립 → 씨에로를 소비자에게 판매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에서 생산된 차량이 폴란드로 무관세로 들어가면서, 두 나라간 자동차에 대한 관세 장벽이 실질적으로 해소되고 단일한 시장 창출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SKD 분리 및 조립 작업에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 그리고 대우를 중간 수출상으로 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등이 관세 면제 혜택을 상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폴란드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고 현지 공장 설비를 이용하여 SKD 분리 및 조립 작업을 하게 되면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대우에게 지급되는 중개 수수료 또한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이 비용들이 관세 면제 혜택을 상쇄하는 효과는 지극히 미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자동차 부품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우는 부품 현지화 비율을 조속히 끌어올리기 위해 루마니아 공장에 엔진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한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루마니아 공장이 필요로 엔진 수요만 바라봐서는 채산성을 맞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대우가 자동차 CKD 생산을 위하여 수입하는 부품들에 대해서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루마니아 공장에서 생산된 엔진을 폴란드 공장에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엔진 생산 → 대우가 중간 수출상 자격으로 생산된 엔진을 구매 → 대우 명의로 폴란드 내로 수입 → 관세 면제 → 수입된 엔진을 폴란드 공장에 공급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에서 생산된 엔진이 폴란드로 무관세로 들어가면서, 두 나라간 자동차부품에 대한 무역 장벽이 실질적으로 해소되고 단일한 생산 시스템 창출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루마니아 공장이 수출 물량 확보에 따라 생산량을 늘려서 대규모 투자에 따른 원가 부담을 극소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아울러 폴란드 공장이 CKD 생산 부품을 루마니아에서 면세로 조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운송비, 관세 등의 비용을 줄여서 폴란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를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이들 나라에 대한 중복 투자를 최대한 피하며 각각의 나라에 특화된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대우가 각 나라로부터 받은 관세 감면 혜택을 잘 융합하고 조정, 조직하여 이 지역을 자동차와 관련 부품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실질적인 자동차 자유 무역 지대로 만들어 낸 사업의 사례들은 이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이 시스템은 역내 자동차 생산 및 판매를 완전 통합하여 단일한 시장과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메이저 업체들이 해온 단순한 글로벌 소싱 (Global Sourcing), 즉 기업의 구매활동 범위를 범세계적 시야로 확대, 외부조달 비용의 절감을 시도하는 구매전략과는 구별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은 글로벌 소싱 차원을 넘어서, 국가가 아닌 민간 기업이 주도한 체제 전환국 간의 경제 블록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간기업이 주도한 체제 전환국 간의 비주류 경제 블록

 

이 글에서는 편의 상 논의를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로 한정했지만 대우는 이 시스템을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뿐 아니라, 체코,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중국에까지 적용하고자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대우가 해체될 당시 이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기초 작업들, 즉 현지 자동차 공장 인수 및 설립, 현지 정부와의 협의 등의 작업들을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동북아에 이르는 체제 전환국 간의 광대한 경제 블록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이한 국가 전략을 가지고 각기 다른 처지에 있던 이들 국가들을 이처럼 하나로 묶어 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결국 그 해답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체제 전환국이라는 공통점일 것입니다. 즉, 이들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주류 국제 경제 질서로 편입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질서로 편입되기 전에 주류 국제 경제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초 체력을 기르고 싶어 했고, 그러한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원하였으며, 그 새로운 질서는 WTO로 대별되는 주류 국제 경제 질서와는 다른 차원의 비주류적인 성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그들 스스로 그러한 경제 질서를 구축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달라진 환경 하에서 국가 간 갈등을 조정하고 협력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그 역할을 하고자 했다면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감과 불신을 초래했을 것이며, 이미 주류 국제 경제 질서 속으로 신속하게 편입하기로 결정한 폴란드 같은 나라가 그 역할을 하고자 했다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의 반발을 초래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적, 경제적 대국이 아니고, 여전히 성장 중이며 과거 경제 개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적의 민간 기업이라면, 더구나 그 기업이 자신의 성장을 그 나라들의 국가 경제의 성장과 기꺼이 연계시켜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기업이었다면 그들은 별 다른 반감없이 그 민간 기업의 리더십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주류 경제블록과 주류 국제 경제 질서와의 조화를 통한 리스크 관리

 

이처럼 체제 전환국 간의 광대한 경제 블록을 가정해 보았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WTO로 대별되는 주류 국제 경제 질서와의 마찰입니다. 즉, 주류 국제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체제 전환국들이 신속히 WTO에 가입하여 주류 국제 경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경제 협력 구조를 만들고 시장을 전폭적으로 개방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이 달갑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심각한 통상 마찰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는 체제 전환국 간의 경제 블록을 뒤흔드는 심각한 위해 요인이 될 것입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대우는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지분을 GM에 매각함으로써 미국을 이 경제 블록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합니다. 1990년대 중반 대우는 동구권 등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 집중 진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한층 드높이고 있었고, 당시 폴란드, 우크라이나 공장 인수전에서 대우에 패해 과거 사회주의 국가 자동차 시장 진출에 제동이 걸렸던 GM은 대우의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GM과의 대우 지분 매각 협상은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우는 이 프로젝트에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적 리스크를 제거하여 프로젝트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주류 국제 경제 질서와의 마찰도 최소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