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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우30년사] 대우의 제2창업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09-11-25 조회수  | 6430
대우30년사

    제1편 시간은 아껴도 땀은 아끼지 않았다


        제3장 신뢰받는 기업으로

            2절 대우의 제2창업




 

80년대 경제환경과 구조조정 정책 


 1981년 제5공화국은 탄생과 함께 고도성장을 지속시키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경제안정시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1980년에 42.3 %였던 도매물가 상승율이 1981년에는 11.3 %로, 1982년에는 2.4 %로 억제시킬 수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제2차 석유파동이 있고 난 다음, 1979년부터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조정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투자조정작업은 실효를 발휘하지 못하고 탁상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의 경제 능력과 세계경제 여건의 변화에 대한 검토와 분석없이 무리하게 추진된 중화학공업육성책은 인플레이션의 심화, 국제수지 적자폭 확대, 경제성장 둔화, 외채의 누적적 증가, 참여기업의 부실화 가속 등의 후유증을 낳았다. 그에 따라 제5공화국의 등장과 함께 1980년 8월 20일, 이른바 8.20조치라는 투자조정방안이 확정되어 실시되었다.


 정부는 8.20조치를 시작으로 강력한 경제안정시책을 펴나갔다.


 첫째, 중화학공업분야 중에서 불요불급한 부문에 대한 투자는 취소 또는 연기하며 전반적인 투자규모도 축소 조정 한다.


 둘째,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기존시설의 가동율을 높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과 동시에 자원배분을 효율화 한다. 이를 위해 다원화 되어 있는 생산체제를 통.폐합 한다.


 <1980년 이후의 투자조정 내역>

1980. 8. 20

 

 

 

 

 

 

1980. 10. 7

▶발전설비 제작

   자동차 생산

 

 

 

 

 

▶중전기구 생산

․생산의 일원화

․승용차 생산의 이원화

․중/소형 트럭 및 버스생산의

   일원화

․특장차 및 1-5톤급 이외의

   차량 생산은 자유화

 

․중합중전기구 생산의 일원화

  (154KV 이상)

1980. 10. 7

 

 

 

 

 

 

 

 

 

 

 

 

 

 

1983. 8.

 

 

1984. 1.

 

1985. 1.

 

 

 

 

▶선박용 디젤엔진

   생산

 

 

 

 

▶동제련

 

▶전자교환기

 

 

 

▶6,000마력 이상

   선박용 디젤엔진

 

▶종전기구 생산

 

▶자동차 생산 

․기타 생산업체는 154KV

   이하에 한정

 

․6,000마력 이상의 엔진

   일원화

․6000마력 이하의 엔진(선박용     및 산업용) 일원화

․차량용 엔진 일원화

 

․일원화

 

․국설 전자교환기 이원화

․농어촌 전자교환기 일원화

․기계식 사설교환기 일원화

 

․이원화 허용

 

 

․신기업참여 허용

 

․차종생산 제한 해제 예고

 


 셋째, 국내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국산 중화학 제품 구입에 대해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 한다.


 넷째 기술수준의 향상 등을 통해 제품의 질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려 수출증대를 모색 한다.


 이러한 투자조정책은 1983년 이후 일부 수정된 것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유지되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재조정이 있고 난 후인 1981-85년 사이의 공업구조는 그 이전과 크게 변화한 것은 없으나 중화학 공업의 비율이 경공업보다 높게 나타났고, 그 비중이 점차 증대 되었다. 또 한동안 그 성장율도 경공업에 비해 훨씬 높게 유지 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로 1980년대 들어 우리경제는 성장세를 회복하고 물가가 획기적으로 안정되었으며 국제수지도 대폭 개선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취한 구조조정 정책의 세가지 축은 안정화시책과 시장원리에 의한 경쟁촉진, 부문간의 균형적인 발전이었다.


 이중 안정화시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80년도에 국제수지는 국민총생산의 9 %에 해당하는 53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도매물가 상승율은 40 %에 육박했다. 따라서 인플레 극복과 국제수지 개선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정책이 불가피 했었던 것이다.


 인플레이션 정책으로서 정부는 총수요를 줄이기 위해 안정적 통화운용과 재정긴축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재정긴축이 물가안정의 열쇠라는 판단 아래 공공부문의 적자를 줄이는데 큰 비중을 두었다.


 재정긴축은 인플레이션 완화작용 보다 훨씬 큰효과를 가져왔다. 즉 재정긴축은 사회전체에 근검정신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정부는 공무원 봉급의 인상을 자재하는 한편, 민간부문 임금에도 적정선을 설정하여 안정화 시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농민도 전보다 낮은 수매가 인상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재정긴축은 다른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부 지출의 삭감으로 직접 고통을 받은 계층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으며 정치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다.


 구조조정 정책의 두 번째 특징은 경쟁의 촉진을 통해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무역과 외국인 투자의 장벽을 줄였으며, 대내적으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제정, 은행의 민영화, 민간부문 규제 간소화 등을 통해 경쟁을 촉진했다. 특히 각 분야의 결정과정에 있어 정부 간섭을 가능한 줄이고 시장 메키니즘 활성화에 큰 중점을 두었다.


 많은 개도국의 경우 국제수지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수출산업 육성이나 수입 대체산업 지원을 위해 정부 간섭을 늘이려는 방법이 상례인데, 우리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대에 정부는 금융과 세제지원을 통해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했다. 그 결과 자원 배분의 왜곡이 누적되고 정부에 대힌 민간기업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값비싼 경험으로 인해 1980년 초에는 시장원리를 존중하는 자유화정책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은 제품 다양화 및 품질개선을 위한 노력, 기술개발 투자를 증대시킨 결과, 기술개발 투자가 국민총생산의 1-2 %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대부분 민간부문에 의한 것이었다. 기술향상과 물가안정은 경쟁력을 강화시켜 수출의 증대를 가져왔고, 나아가 국제수지 흑자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국제수지 개선으로 1985년말 468억달러에 달하던 외채(外債)도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외개방 정책이 국내산업에 미치는 피해가 적었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수입개방은 관련 국내산업의 효용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어떤 경우는 그 성과가 매우 커서 수출산업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구조조정정책의 세 번째 특징은 균형된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경제가 계속 성장함에 따라 부문간 균형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다. 도시와 농촌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소득계층간의 격차가 더 이상 확대될 경우 정부시책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협조를 얻기가 어려워져 구조 조정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는 단계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임박해 있었다. 


 그런때 정부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도시와 농촌간 소득격차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농간의 격차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안정화 시책이 농산물 가격인상 억제와 농업부문 보조금 축소를 수반했던 만큼 격차축소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는 농촌지역 개발, 특히 농공지구 조정을 추진하고 중소기업이 농촌에 공장을 세우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농촌부문의 고용증대와 농업외 소득을 늘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한때나마 소득계층간의 격차를 줄이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소득계층간의 격차를 이 방법만으로 해소하기는 어려웠고, 국민들 또한 온전한 해소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자료출처 및 소유권 : 세계경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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